'대통령의 강'에 빠진 정당과 발을 뺀 정당
'대통령의 강'에 빠진 정당과 발을 뺀 정당
Blog Article
[김종성 기자]
▲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 이승만 박사가 앉아있다.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과 함께한 정당은 자유당뿐만이 아니다. 한국민주당(한민당)도 그를 아주 진하게 겪었다. 두 당은 이승만의 정치 행보에 결정적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그LTV, DTI
런데 두 당은 이승만 리스크에 대해 정반대 반응을 보였다. 이것이 양당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1951년 12월 23일 창당된 자유당은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망명 때까지 약 8년 5개월간 그를 겪었다. 이승만은 1945년 9월 16일 창당된 한민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지만, 해방되던 그해부터 이 당과 제휴했다.
율계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식민 총독부에서 고관을 지낸 많은 한인들이 한민당과 긴밀하게 연결"됐다고 한 뒤 "초기의 조직에는 망명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구"도 포함됐다고 기술한다.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도 이처럼 초창기 한민당과 협력했지만, 이 제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는 이승만 리스크에 대한 한민당의 반응과 관련이외환은행 학자금대출
있다.
33년 만인 1945년 10월 16일의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 땅에 집도 절도 없었다. 그가 그해 10월 24일부터 1947년 8월 18일까지 서울 성북구 돈암장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지낸 것은 한민당 지도자 장덕수의 주선 덕분이다. 그곳은 장덕수의 제자인 장진영의 집이었다. 돈암장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연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신협파산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연대는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에 깨졌다. 그해 8월 18일 자 <동아일보>는 "신정부 수립을 계기로 이 대통령은 행정부와 아울러 입법부의 영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부여당을 조직하려는 태세를 가추고 있으며"라고 전했다.
신문은 위와 같이 이승만의 신당 창당 움직임을 언급한 뒤, "한민당은 이제패턴 수학 중학 3-2 답지
신정부 시책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이라고 하며, 어데까지나 야당으로 당세를 확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민당이 야당의 길을 준비한다는 이 보도가 1948년 8월 중순에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 한민당과 이승만의 연대는 3년을 못 넘겼다.
친일세력인 한민당에서 발전한 정당은 해공 신익희(1894~1956) 등에 의기업은행 주택담보대출
해 반독재 정당으로 거듭나고 김대중·김영삼 등에 의해 민주화 정당으로 거듭나고 노무현 등에 의해 진보적 성격을 띠게 됐다. 보다 정통성 있는 세력이 반독재·민주화·진보운동을 주도하지 못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다. 그 같은 세 차례의 변화 이전에 한민당은 이승만과 손을 잡았다. 그 기간은 자유당의 8년 5개월에 비하면 훨씬 짧지만, 그 연대의 결과물은 원피스 진행상황
꽤 굵었다.
기득권세력인 한민당이 돕지 않았다면 국내 기반이 거의 전무했던 이승만이 귀국 3년도 안 되는 시점에 대통령이 되기는 힘들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을 장기집권 독재자로 만들어준 정당이라면, 한민당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정당이다. 한민당이 이승만을 돕지 않았다면, 훗날 자유당이 그를 도울 기회가 생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화생명 전세자금대출
이승만의 위험성
이승만에게 큰 은혜를 베푼 한민당은 그에게서 매우 신속히 등을 돌렸다. 정부수립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을 겪은 한민당은 긴 고민 없이 태도를 180도 바꿨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한민당의 지원에 힘입어 여유 있게 당선됐다. 한민당은 신용불량자 햇살론
이승만이 자당 지도자인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지명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승만은 이북 출신인 이윤영 의원을 총리로 내세웠다. 이남 기반이 취약해 이승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이윤영을 임명한 이승만은 남북통일을 위한 조치라는 등의 구실을 표방했다.
1948년 헌법(제헌헌법) 제69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고용주가 직원에게 보내는 해고통보 메일을 의미하는 용어
얻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한민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배신한 이승만을 응징하기 위해 이 조문을 활용했다.
그해 5·10 총선 당선자 200명 중에서 한민당 당적을 표방한 사람은 29명이지만, 실질적인 한민당 의원은 훨씬 많았다. 그달 20일 자 <동아일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거나 이중 당적을 가진 실제의 한민당 의원은 84명이며, 한민당에 합류할 의원까지 합치면 1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이 보도가 과장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윤영 인준 여부를 놓고 벌어진 7월 27일 국회 표결이 '가 59, 부 132'로 판가름 난 데서 확인된다. 7월 20일 대선에서 이승만을 지지한 180표의 상당수가 불과 일주일 사이에 반(反)이승만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윤영 임명 건으로 배신당한 한민당은 그 직후에 또 한 번 배신을 맛봤다. 이윤영에 이어 새로운 후보가 된 이범석이 인준 협력을 요청하자 김성수는 또다시 기대감을 걸었다. 1968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 '역대 총리 장관론(論)' 제1회에 따르면, 1948년 8월 1일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제헌국회 내에서 한민당의 영향을 받는 의원이 약 80명인데, 지지해줄테니 대신 12부 4처의 각료 중 8석을 한민당에 달라"고 요구했다. 이범석은 "그래 봅시다"라고 답했다.
다음날 이범석은 110표를 받아 총리로 가는 관문을 통과했다. 이범석을 뒤따라 한민당이 그 문에 들어서려 하자 문은 얼른 닫혔다. 한민당은 단 한 사람의 각료도 추천하지 못했다. 한민당 소속의 김도연과 이인이 각각 재무 및 법무장관이 됐지만, 이는 한민당의 추천에 의한 게 아니었다.
이승만이 김성수가 아닌 이윤영을 지명한 일, 김성수가 이범석을 지지했다가 또다시 헛물을 켠 일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벌어졌다. 이 경험은 한민당이 이승만 리스크에 유의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이 당선된 지 1개월도 안 되는 시점에 한민당이 야당의 길을 선언한 것은 그 두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의 위험성을 인지한 결과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의 주류였던 사람들은 주로 1945년에 한민당으로, 비주류였던 사람들은 주로 1951년 이후에 자유당으로 들어갔다. 정당 조직화에서 멀찌감치 앞선 한민당은 주변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이승만의 기질을 체험하자마자 얼른 발을 뗐다. 반면, 자유당은 이승만에 대한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해 끌려다니다가 4·19혁명과 함께 '이승만의 강'에 빠져 폐족이 됐다.
'배신'의 정치
▲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이승만의 정치는 주위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배신'의 정치였다. 자유당은 한민당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 배신을 지켜봤다. 이승만은 주권자를 속이는 부정선거와 주권자를 죽이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또 계엄선포권을 남용해 국회를 공격하는 내란을 저질렀다. 그는 그 자신도 예외 없이 배신했다. 임시정부의 탄핵을 받기는 했지만 독립운동가로 오래 살아온 스스로를 부정하고 친일청산 훼방과 국회 반민특위 공격에 나섰다.
그는 우당인 한민당을 배신했듯 자당인 자유당도 배신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 때는 자당 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무소속 함태영을 지지했다. 이를 위해 시도지사들과 지방경찰국장들을 움직여 결국 당선시켰다. 자당 부통령 후보인 이범석이 강력한 2인자가 될 가능성을 견제하겠다는 등의 고려가 깔린 배당·반당 행위였다. 이는 전체 자유당 당원에 대한 배신이자 반역이었다.
자유당은 사회단체인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맹·농민조합연맹·대한부인회 등과 더불어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출신들을 기반으로 창당됐다. 자유당이 지방 조직을 신속히 구축한 것은 족청의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창당 2년이 되는 1953년 12월 이후로 족청 출신을 무력화시켰다.
이승만이 그런 행태를 보였으므로, 그 곁에 있으면 언젠가 재앙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은 얼마든지 예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 구성원 상당수는 그 소굴을 얼른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절대 충성을 서약했다. 그래서 자유당은 더욱더 이승만의 사당이 되고 친위 세력이 됐다.
물론 모든 자유당 성원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3선 개헌을 강행하기 위해 '135.33명은 135명'이라는 사사오입 논리를 내세우는 이승만을 보고 그와 결별한 의원들도 있다.
1954년 11월 27일의 국회 개헌투표에서 찬성표는 135표였다. 203명 중에서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므로 의결정족수는 136명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135.33은 135'라며 개헌안을 공포했다. 수학 원리까지 무시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고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당 의원 14명이 이 소굴을 빠져나왔다. 이들 자유당 탈당파는 한민당 계열 등과 합세해 1955년에 민주당을 결성했다.
그런 예외도 있긴 하지만, 자유당 당원의 상당수는 이승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만이 1952년과 1954년에 불법 개헌을 강행하고, 1952년과 1956년 대선을 부정한 방법으로 치르고, 진보당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키고, 소수의 당무위원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는 1957년 당헌 개정을 통해 당을 과두화시키는 데도 계속 그렇게 했다.
이승만의 부조리에 정면 항거하는 용감한 당원들은 자유당의 대세를 이루지 못했다. 현재 떨어지는 떡고물, 앞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떡고물을 기대하며 온갖 부조리를 외면한 채, 이승만을 향해 입을 벌린 사람들이 그 당의 중추가 됐다. 결국 이 당은 4·19혁명의 직격탄을 맞고 이승만의 강으로 침몰했다. 이들은 그해 7·29 총선에서 민의원 2석, 참의원 4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뒤 서서히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