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백인 민족주의는 결코 '한줌 꼴통들'의 이념이 아니다
[가만한 당신] 백인 민족주의는 결코 '한줌 꼴통들'의 이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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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제스킨드는 미국 사회가 시민권운동의 법-제도적 성취로 들떠 있던 1970년대부터 백인 민족주의-우월주의의 실체 및 동태를 현장에서 연구하며, 그들의 잠재적 파괴력을 선구적으로 경고해온 재야 학자 겸 활동가다. 그는 리버럴 진영이 첫 흑인 대통령을 맞이하며 다인종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던 2009년 '혈통과 정치'란 책으로 백인 민족주의의 정치적 주류화, 다시 말해 도널드 트럼프와 마가 공화당의 등장을 경고했다. 한 반인종주의 행사장에서 강연하는 만년의 제스킨드. Suzanne Corum-Rich, indianexpress.com
2008년 말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리버럴 성향 미국 시민들은 인종주의에 대한 미국 민주주의의 완벽한 승리소액대출쉬운곳
라고 자축했다. LA타임스는 선거 기간 퍼부어지던 극우집단의 인종주의적 음모론이 “불가능한 미래(impossible future)에 대한 선동으로 판명났다”고 선언했고, NPR은 150년 전 소멸한 남부 연합에 집착하는 “한줌 꼴통들(a handful of bigots)”에도 불구하고 "7,000만 시민은 미국 사회의 압도적인 관용을 증명”했다고 평가했다.은행대출이자계산법
이듬해 5월, 그러니까 승리감에 도취돼 있던 리버럴 진영의 벅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책 한 권이 출간됐다. 거의 평생 극우 민족주의-백인 우월주의의 실체와 동태를 현장에서 연구해온 재야 학자 겸 활동가 레너드 제스킨드(Leonard Zeskind)가 '변방에서 주류로 진화한 백인 민족주의 운동의 역사’란 부제를 달아 낸 ‘혈통과 정치(Blood and농협제1금융권
Politics)’였다. 물론 그 책에 진지하게 주목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시대 변화에 뒤처진 외골수 비주류 학자의 호들갑 혹은 쓸쓸한 자기 증명쯤으로 치부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만했다.
2016년 대선 기간 줄기차게 반이민 노선 공약으로 인종주의를 선동하던 도널드 트럼프가 다수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이 됐고, 이듬해 8월아파트담보대출 최저금리
버지니아주 샬럿츠빌에선 네오 나치를 비롯한 수십여 개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이 대규모 연합집회를 열었다.
2019년 12월 퓨리서치센터는 인종 다양성-이민 확대에 대한 유권자 설문조사 발표로 소위 민심의 또다른 ‘진실’을 알렸다. 3년 전 대선 표심과 달리, 응답자의 67%가 이민 확대를 지지한 거였다. 이민자 증가가 미국의 관습과 가치서브프라임결과
를 강화할 것이라고 답한 이들도 전체의 57%로 2015년 5월 조사(46%) 때보다 11%P 높았다. 보고서는 이민-인종 다양성을 둘러싼 미국 사회의 가시적 분열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 간극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곤 2024년. 다시 대선에 나선 트럼프는 선거인단뿐 아니라 유권자 투표에서도 7,728만여 표(49.8%)개인파산신청조건
를 얻어 민주당 후보 카말라 해리스(48.3%)를 넘어섰다. 트럼프의 득표율은 2020년 조 바이든(8,128만여 표)에 이은 미국 역대 대선 2위였고, 2020년 선거 때보다 300만여 표, 2016년보단 1,430만여 표나 더 얻은 기록이었다.
제스킨드의 2009년 책 취업알선기관
'Blood and Politics' 표지. 그는 1970년대부터 다양한 인종주의 단체 행사장 연설과 간행물,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백인 민족주의의 본질과 동태를 분석해 저 책을 썼다. 트럼프 행정부는 저 책 등 381종을 인종주의 관련 도서 즉 사실상 금서로 지정, 해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 솎아냈다. Straus and Giro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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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선거 결과의 현저한 격차와 미국 유권자들의 급격한 우경화, 특히 반이민-인종주의의 확산을 두고 수많은 학자와 연구소, 저널리스트들이 여러 논문과 보고서, 기사들을 쏟아냈다. 백인 민족주의-우월주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확산돼 왔는가. 극소수 극단주의자들의 비뚤어진 이념과 논리에 거대 주류 정당과 유해외직배송
권자 다수가 포획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은 비로소, 인정하고 싶지 않던 자신들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대면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정치 컨설턴트 겸 바이든 정부의 백악관 관료 출신 CEO가 이끄는 비영리 자유주의 공공정책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의 인종문제 담당 선임연구원 사이먼 클라크(Simon Clark)는 인종주의 선청주저축은행
동가들이 과거의 노골적인 차별- 혐오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우회하면서 비백인 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이념적 포장술을 개량한 게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인종 우열의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선동 논리들, 예컨대 (유색 인종) 이민 확대가 (백인) 원주민을 수적으로 압도함으로써 백인 국가 미국을 유색인 국가로 변질시키려 한다는 이른바 ‘거대한 재편(great replacement)’ 논리, 백인에 대한 이민자의 느린 형태의 ‘제노사이드’ 선동. 기후 위기와 부족한 자원을 앞세워 반이민- 차별 정서를 부각하는 기형적 환경 논리도 그 예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더 이상, 억만장자 유대인 조지 소로스 등이 의도적으로 자금을 퍼부어 중앙아메리카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따위의 저급한 음모론에 낚인 이들만은 아니라는 거였다.
하지만, 포장술의 진화든 논리적 곡예의 결과든, 민주당 성향 학자 및 언론인들이 분석한 바의 골자는 여전히 미국 유권자들 특히 백인 저학력 노동자들이 소수 극우 선동가들의 수작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 역시 역사적-윤리적 우월의식에 도취된 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진보 엘리트들의 백인 민족주의자 및 마가(MAGA) 공화당원들에 대한 타자화-열등화는 아닐까. 제스킨드는 트럼프가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오바마 당선 이전 아니 70년대 시민권운동 성과들의 잇단 법제화로 미국 민주주의가 마치 완성된 듯 여기던 시절부터, 백인 민족주의의 확산과 주류화를 경고해왔다. 그는 “백인 민족주의- 우월주의는 미국 역사의 처음서부터 존재해온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다. 그것이 우리의 전체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쳐온 만큼 우리는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더 깊고 폭넓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단지 경제적으로 운이 나빠서 교육을 못 받은 촌뜨기 무리(bunch of bumpkins)가 아니다. 그들의 분포는 노동계급과 중산층 등 일반 백인 미국인들의 인구통계학적 구성과 다를 바 없으며 리더집단에는 교수와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는 네오 나치와 다양한 기독교 정체성 단체들, 민병대 등 이질적으로 보이는 여러 조직들이 “단순히 ‘증오’를 공유하는 단절된 조직이 아니라 정교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며 공통의 지도자와 상호 연결된 단일체적 운동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백인 민족주의-우월주의의 동태를 추적하며 그들의 진화와 조직화, 임박한 반격의 위험성을 선구적으로 경고해온 레너드 제스킨드가 최근 별세했다. 향년 75세.
1990년 조지아주 게인즈빌에서 열린 KKK 잡회 현장을 취재하던 무렵의 레너드 제스킨드(왼쪽). 등을 돌린 이는 당시 제스킨드가 연구 책임자로 몸담고 있던 민주주의 재생센터(CDR) 책임자 대니얼 레비타스(Daniel Levitas)다. CDR 사진.
레너드 해럴드 제스킨드는 유대인 연금관리업자의 아들로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플로리다에서 성장했다. 플로리다대와 캔자스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60년대 그는 학내 ‘ROTC’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그길로 캔자스시 직업기술센터에 등록해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약 13년간 건설 현장과 자동차 공장 등서 철강 용접-조립공으로 살면서 지역 공동체 조직과 함께 노동계층 이웃들의 인종적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만 13세 되던 해, 유대교회당에서 열린 자신의 성인식(Bar Mitzvah)에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지부 회장의 연설을 듣고 인권운동, 특히 인종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별의 주체인 백인들의 각성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날 이후 나는 한순간도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1920,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 농업의 최대 위기로 꼽히는 80년대 농업 위기- 고금리, 고유가(인플레이션), 농가 부채 급증과 은행과 농가 연쇄 파산- 와중에 들불처럼 번지던 음모론 즉 유대인 은행가들이 백인 기독교인들을 말려 죽이려 한다는 풍문에 잇달아 만들어지던 농민 민병대 ‘포시 코미타투스(Posse Comitatus)’들. 제스킨드는 캔자스의 한 농촌에서 그 과정을 직접 체험했다. 79년 만나 결혼한 아내 캐럴 스미스(Carol Smith)가 지역 목축업자의 딸이었다.
그는 1983년 몇몇 지인들과 함께 ‘인권연구교육위원회(IREHR)’란 단체를 설립해 인종 증오집단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주민 교육을 시작했고, '전국 반클랜 네트워크(National Anti-Klan Network)'의 후신인 '민주주의 재생센터(CDR)' 연구 책임자로 85년부터 만 10년간 재직했다. 82년부터 ‘반인종주의, 반파시스트 뉴스 및 분석’이란 부제를 단 잡지 ‘The Hammer’를 발간, 인종주의 사건에 관한 한 가장 현장에 밀착된 뉴스와 자료를 생산했고, 92년 CDR의 소책자 ‘증오집단이 마을에 등장할 때’를 책임편집했다. 지역 단위 인종주의 대응 매뉴얼이었다. 저 일련의 활동으로 그는 1998년 맥아더 재단 '천재상(Genius Grant)'이라 불리는 '존 D. & 캐서린 T. 맥아더 재단'의 맥아더 펠로십을 받았다. 재단은 “인종주의와 증오 단체에 대한 그의 연구(저널리즘 보도)가 있기 전까지 조직화된 극단주의 단체의 국제적 범위와 위력, 회복력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의 전문성은 20년 이상 광범위하게 진행된 KKK와 신나치 단체 간행물 모니터링과 정보원 네트워크, 미국-유럽 반인종주의 조직 및 커뮤니티와의 교류를 통해 구축됐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의 전문성은 위험을 무릅쓴 인종주의 단체 집회 현장 취재와 연설 녹취 등으로도 뒷받침됐다. 훗날 그는 “선량한 유대인 소년으로서, 나는 누구보다 많은 클랜 집회와 네오나치 모임, 코미타투스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농담처럼 말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글을 썼고, 국내외 여러 대학과 단체 행사장에서 강연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특히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이들이 그의 메시지를 무겁게 수용했는지는 미지수다. 그는 92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작업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내가 미쳤다고도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백인 우월주의를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실재로써 연구한다."
제스킨드는 백인 우월주의의 혈맥이 건국 이후 노예제시대와 1850년대 ‘노너싱 운동(Know Nothing Movement)’, 20세기 짐 크로 시대를 관통해온 미국 역사의 핵심적 일부라고 책에 썼다. 사이먼 클라크의 판단과 달리, 그는 인종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피억압자로 규정한 것은 1960년대 시민권운동 이후부터라고 주장했다. 다양성 헤게모니에 짓눌린 자칭 ‘체제의 피억압자-백인’들에게 흑인은, 또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온 갈색 피부의 이민자들”은 북유럽계 이민자 중심 백인 국가 미국의 전통을 훼손해 자신들의 조국을 ‘제3세계’로 전락시킬 파국적 위협이다. 건국 이후 그들의 미국은 언제나 “다인종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백인 기독교 공화국”이고, 그 신념이 백인 우월주의-민족주의 운동의 뿌리였다. 흑인 대통령 당선은 미국 민주주의의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인종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을 증폭시킨 계기 중 하나였다.
2008년 11월 낙태권 의사 조지 틸러(George Tiller)에 대한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테러 살인 배경에도 조직적으로 단단히 엮인 신나치 백인 민족주의 이념이 깔려 있다며 2009년 허핑턴포스트 에세이에 썼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들의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고, (맹렬한 낙태권 옹호론자인) 소니아 소토마요르의 연방대법관 지명이 저 테러의 유일한 동기도 아니었다. 더 끔찍하고(whiter) 더 위험한 일들은 지난해 11월보다 훨씬 앞서부터 이어져왔고, 우리는 아직 마지막 소식을 듣지 못했다.”
1996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에 출마해 유세하던 무렵의 팻 뷰캐넌(위 사진). 그는 트럼프보다 먼저 미국-멕시코 국경 봉쇄 등을 주장하며 백인 민족주의를 선동한 미국 주류 정치인 중 한 명이다. AP 연합뉴스. 아래 사진은 2017년 8월 버지나아 샬러츠빌에서 열린 백인 우월주의 단체 회원들의 연합 집회 및 행진 장면. 게티 이미지
그가 말한 “더 끔찍하고 더 위험한 일들” 중에는 1970년대 KKK의 ‘대마법사’라 불린 네오나치 정치인 데이비드 듀크가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1988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이듬해 루이지애나주 하원선거에서 당선된 일, 1992년 반이민, 미국 우선-고립주의의 깃발로 강경 보수세를 결집해 현직 대통령 조지 H.W. 부시와의 경선에서 23%나 득표한 팻 뷰캐넌의 돌풍 등을 꼽았다. 뷰캐넌은 “우리의 서구 유산이 다문화주의라는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지지 않고 미래세대에 계승될 수 있도록 하자”며 2000년 개혁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제스킨드는 “그런 사건들에 당신의 머리카락이 곤두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인권 인종 정의를 위한 비영리 법률지원단체인 남부빈곤법률센터(SPLC)와의 1999년 인터뷰에서 백인 민족주의가 주류 정치담론으로 ‘밀반입’된 분기점으로 닉슨 공화당원이던 팻 뷰캐넌이 조지 H.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반기를 든 순간을 꼽았다. 이라크에는 적=공산주의자가 없다는 게 그의 주된 반전 명분이었다. 제스킨드는 미국의 새로운 고립주의- 백인 민족주의가 그렇게 시작됐다고 말했다. 2018년 공화당 하원의원 스티브 킹(Steve King)은 수정헌법 14조의 ‘출생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 조항, 즉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받게 한 조항을 부정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이듬해 한 인터뷰에선 “백인 민족주의자, 백인 우월주의자, 서구 문명이란 말이 언제부터 역겨운 말이 되었나”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2025년 도널드 트럼프는 취임 첫날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연방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린 채 대법원 심리를 앞두고 있다. 2018년 의회 타운홀 미팅 연설에서 제스킨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비백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증오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제스킨드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 백인 민족주의 확산-주류화의 결정적 계기는 탈냉전과 세계화였다. 적(공산주의)이 사라지면서 ‘나’와 타자의 새로운 경계가 필요해졌다는 것. 소비에트 해체 직후 구유고슬라비아에 빚어진 민족집단 간 전쟁,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 체첸 민족주의 반군의 독립 테러….그는 미국의 백인 민족주의-우월주의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즉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우리는 반공주의자’에서 ‘우리는 백인’으로 바뀐 것이다. (…) 더 이상 네오 나치나 아리안 국가(Arian Nations)’에 국한되지 않는, 엄청나게 광범위한 운동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백인 민족주의의 심각한 도전에 맞서 다인종 민주주의의 대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 우리 자신이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오랜 동지인 인권연구교육위원회 대표 데번 버거트(Devon Burghart)는 NPR 인터뷰에서, 제스킨드는 말년까지 백인 민족주의와의 싸움에 대해 낙관했다고 말했다. “그는 약 30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내게 했던 말- “파시즘과 싸우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고, 지금이야말로 일하고 조직화하기 딱 좋은 시기다”를 환기하곤 했어요.”
최윤필 기자 [email protected]